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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귀산방(晩歸山房)

성산이씨 응와종택(星山李氏 凝窩宗宅)

26.2x70.3x2.2 / 행서(行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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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만귀산방(晩歸山房)
  • 글자체 행서(行書)
  • 크기 26.2x70.3x2.2
  • 건물명 만귀산방(晩歸山房)
  • 공간명 성산이씨 응와종택(星山李氏 凝窩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 포천계곡-홍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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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귀산방(晩歸山房)

만귀산방(晩歸山房)


만귀산방(晩歸山房)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1792∼1872)가 1851년 경상북도 성주군 가천면 신계리에 건립한 만귀정(晩歸亭) 출입문에 걸려 있던 편액이다. ‘만귀’는 이원조가 오랜 벼슬살이로 인해 늦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는 의미와 정자는 건립함에 있어 터를 잡는데 10년이 걸리고 집을 짓는데 3년이 걸려 모두 13년 만에 정자를 지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원조가 1853년에 지은 「만귀정기晩歸亭記」를 살펴보면 “1843년에 제주(齊州)에서 돌아와 목재와 기와를 사놓았고, 1846년 자주에 있으면서 예서를 잘 쓰는 소눌(小訥) 조석신(曺錫臣)에게 편액을 부탁하였으며, 1850년에 경주부윤을 마치고 돌아와서 처음에는 청천(淸川)의 수렴(水簾)에 터를 잡았다가 중간에는 조암(祖巖)의 강 언덕으로 옮겼다가, 결국 포천 위 홍개동에 터를 잡아 정자를 짓게 되었는데, 터를 잡는 데만 10년이 걸렸고, 정자를 짓는 데에 또 3년이 걸렸다. …… 왼쪽은 종우헌(踵雩軒), 가운데는 오여재(吾與齋), 그리고 오른쪽에는 수조루(水調樓)라 이름 붙였다. 그리고 수조루 아래에는 병촉실을 두었고 동쪽 문미에는 부운유수각(浮雲流水閣), 서쪽 문미에는 장연호월헌(長烟晧月軒)이라 명명하였다”고 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행서체이다.

행서는 경쾌하게 걸어가는 듯 그런 리듬으로 쓴다. 약간의 흥취를 곁들일 수 있다. 이 편액은 행서로서 리듬도 있고 흥취도 있다. 그러나 단정하게 정돈된 공간 안에서 감추고 절제되었다. 꼿꼿하면서도 속박됨이 위축될 듯도 하지만 과하고 넘치는 지금 시대에 오히려 더 빛나는 소박한 글씨이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성산이씨 응와종택(星山李氏 凝窩宗宅) 소개


이원조의 본관은 성산(星山), 초명(初名)은 영조(永祚), 자는 주현(周賢), 호는 응와(凝窩)·취송(鷲松)·호우(毫宇), 시호는 정헌(定憲)이다. 아버지는 사헌부장령을 지낸 이규진(李奎鎭)이고 생부는 생원 이형진(李亨鎭)이다. 8세에 학업을 시작하여 2년 만에 『주역』을 제외한 사서이경에 모두 통하여 문의에 막힘이 없었다. 15세 때 처향인 상주에서 처숙인 매은(梅隱) 조승수(趙承洙)에게 『대학』과 『중용』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18세에 증광문과에 최연소로 급제하였고 이 해 겨울에 승정원가주서로 벼슬을 시작하였다. 승정원에 출사하였고, 1817년 전적을 거쳐 예조·병조의 좌랑에 승진, 이듬해 지평에서 이조낭관이 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826년 성균관직강에서 경성현감에 임명되고 1832년 사서를 거쳐 1836년(헌종 2) 정언으로 실록편수관을 겸했다. 1839년 장령에 올라 군자감정이 되고 이듬해 강릉부사에 임명되어 삼정폐소를 설치하여 조세와 부역을 경감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1841년 제주목사가 되어 삼천숙을 세워 교학을 장려하고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1843년 형조참의, 우부승지·좌부승지를 역임하고 1850년 경주부윤이 되었다가 1856년(철종 7) 병조참판에 올랐다. 1865년(고종 2) 한성판윤이 되고 이듬해 공조판서에 승진, 1869년 정헌대부, 1871년 숭정대부에 올랐다. 이원조는 퇴계학파의 학자들과 종유하면서 주자와 퇴계를 학문적 모범으로 삼았으나,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중심으로 하는 남명학파의 학풍에도 관심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기호학파의 성리설까지 수용하여 장점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만귀정은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6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원조가 1851년에 귀향하여 독서와 자연을 벗 삼아 여생을 보낸 곳이라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건물은 북동쪽을 향해 경사지에 서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이다.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만귀정과 평삼문이 이자형으로 놓여 있고, 평삼문 입구에는 철제로 된 ‘흥학창선비(興學倡善碑)’가 서 있으며 이원조의 학문 진흥에 대한 의지를 담고 있다.

이원조는 한개마을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한개마을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한개마을은 경상북도 성주군 월항면 대산 1리에 위치한 조선 초기에 형성된 문화재 한옥마을로, 중요민속문화재 제2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세종 때 진주목사를 역임한 이우(李友)가 1450년경에 입향한 이래 560여 년을 내려오면서 성산이씨(星山李氏)가 모여 살고 있는 전통 씨족마을이다. 다수의 전통한옥이 보전되어 있으며,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 9개 동에 이른다. 한개마을은 월봉(月峯) 이정현(李廷賢, 1587∼1612)에 와서 성산이씨의 씨족마을로 온전히 자리 잡는다. 월봉에게는 외아들 이수성(李壽星, 1610∼1672)이 있었는데, 수성은 달천·달우·달한·달운 등 네 아들을 두었다. 그들은 모두 마을에 정착하여 각각 백파(伯派)·중파(仲派)·숙파(叔派)·계파(季派)의 파시조가 되고 각 파의 자손들이 마을공간을 본격적으로 일궜다. 따라서 이 마을이 성산이씨의 씨족마을로 번성한 것은 이수성 때인 17세기 중엽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이 번창했을 때는 100호가 넘었다고 하나, 현재는 69호의 집이 있다. 마을을 구성하는 집들 가운데 하회댁은 1750년경에 지어졌으며, 교리댁·북비고택·한주종택은 1700년대 후반에 그리고 다른 큰 한옥들은 대개 1800년대에 건축되었다. 6·25전쟁 때에는 큰 피해를 입어 여러 채의 한옥이 파손되거나 완전히 소실되었다.

과거에 한개마을은 대체로 안길을 기준으로 다섯 부분으로 나뉘었다. 주거지의 뒤쪽 중앙부를 한개 또는 윗마라고 부르고, 그 동쪽과 서쪽을 각각 동녘, 서녘이라 했다. 그리고 진사댁 앞의 동서방향 길 주변은 도촌, 그 아래는 아랫막 또는 아랫마라고 불렀다. 이 마을에 뿌리를 내린 성산이씨의 네 파는 모두 자손을 두었고 차남 이하의 자식들은 분가를 해나갔다. 그런데 네 파의 자손들은 뒤섞여 살지 않고, 대체로 같은 파에 속하는 집끼리 모여 살았다. 대체로 윗마와 서녘에는 백파와 숙파의 자손들이, 동녘·도촌·아랫막에는 계파의 자손들이 무리를 이루었다. 그 결과, 네 파 중 가장 번성하여 학문적으로 또 사회경제적으로 우월한 사람들이 산 윗마와 서녘에는 격식을 갖춘 한옥들이 많이 지어졌다. 반면 그 밖의 공간에는 일반 민가들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한개마을에는 첨경재(瞻敬齋), 월봉정(月峯亭 한천서당寒川書堂), 서륜재(敍倫齋), 일관정(一貫亭), 귀락정(歸洛亭: 여동서당餘洞書堂) 등 다섯 동의 재실이 있어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 등 많은 선비들이 살던 마을의 품격을 느낄 수 있다.

한개마을의 이야기 중에 빠트릴 수 없는 것이 있는데, 다름 아닌 북비고택이다. 이곳의 주인은 조선 영조 때 사도세자의 호위무관이었던 돈재(遯齋) 이석문(李碩文, 1713~1773)이다. 그가 1762년 선전관으로 있을 때 창경궁 휘녕전으로 거동하는 영조를 배종하였다. 영조가 사도세자가 갇혀 있는 뒤주 위에 큰 돌을 올려놓으라고 하자 “신은 죽더라도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튿날 곤장 50대를 맞고 삭탈관직을 당하여 고향인 한개마을로 내려와 지조를 지키며 살았다. 그런데 김상로(金尙魯), 홍계희(洪啓禧) 등이 그의 집 앞을 왕래하자 이것이 보기 싫어 남문을 뜯어 북쪽으로 옮기고는 북비(北扉)라 편액하였다. 1799년에 그의 손자이자 이원조의 아버지가 알성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자 정조가 “너의 조부가 세운 공이 가상하도다.”라 하였고, 영의정 채제공에게는 “북비가 아직도 있는가?”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한국국학진흥원, 『성산이씨 응와종택』, 한국국학진흥원소장 국학자료목록집14, 2013.
  • [네이버 지식백과] 성주만귀정 [星州晩歸亭] (두산백과)
  • 「만귀정기晩歸亭記」, 『응와집凝窩集』 권15.